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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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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럴드 2세는 잉글랜드의 마지막 앵글로색슨 왕으로, 웨섹스 백작 고드윈과 기사 토르켈스도티르의 아들이다. 1045년 이스트 앵글리아 백작이 되었고, 이후 웨식스 백작위를 승계하여 왕에 버금가는 세력을 갖게 되었다. 1064년 노르망디를 방문하여 윌리엄 공작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설이 있으며, 1066년 참회왕 에드워드의 사망 후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중 노르웨이의 하랄 3세의 침공과 윌리엄 공작의 침공을 동시에 겪었으며, 스탬퍼드브리지 전투에서 하랄 3세를 격퇴했으나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윌리엄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 해럴드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며, 눈에 화살을 맞아 사망했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두 명의 부인과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혈통은 후대에 영국 왕실과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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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베유 태피스트리의 해럴드 고드윈슨
해럴드 고드윈슨 (베유 태피스트리에서)
왕위잉글랜드 국왕
통치 기간1066년 1월 5일 – 1066년 10월 14일
대관식1066년 1월 6일
이전에드워드 참회왕
계승에드거 애설링 (미대관)
윌리엄 1세 (대관)
배우자에디스
에디스 오브 머시아
자녀고드윈
에드먼드
마그누스
군힐드
기타
해럴드
울프
왕가고드윈
아버지고드윈
어머니기타
출생1022년경
출생지웨섹스, 잉글랜드
사망1066년 10월 14일 (약 44세)
사망 장소센락 힐 근처, 서식스, 잉글랜드
매장지월섬 수도원 교회, 에식스, 또는 보셤, 서식스 (논쟁 중)
작위
웨섹스 백작1053년 – 1066년
이전고드윈
이후윌리엄 핏츠오스번
이스트앵글리아 백작1052년 – 1053년
이전앨프가르
이후앨프가르

2. 집안 배경

해럴드는 잉글랜드의 유력 귀족 웨섹스 백작 고드윈과 기사 토르켈스도티르의 아들이었다. 기사의 오빠 울프는 덴마크 왕스벤 1세의 딸이자 크누트 대왕의 여동생인 아스트리드 스벤스다터와 결혼했다. 울프와 아스트리드의 아들은 훗날 스벤 2세로 덴마크 왕위에 올랐다.[26]

2. 1. 아버지 고드윈 가문

해럴드는 웨섹스 백작 고드윈(c. 1001-1053)과 기사 토르켈스도티르의 아들이었다. 고드윈은 서식스 출신의 테인 울프노스 칠드의 아들로,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 왕을 지지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지만, 1018년 크누트 대왕이 그를 웨섹스 백작으로 임명하면서 크누트 왕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3] 고드윈은 크누트의 통치 기간 동안 계속 백작으로 남았으며, 크누트 치세가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두 백작 중 한 명이었다.[4]

1035년 크누트가 사망하자 고드윈은 하르다크누트를 지지했지만, 1037년에 입장을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하르다크누트의 이복 형제이자 훗날 국왕이 된 참회왕 에드워드의 동생인 앨프레드 애설링을 살해하는 데 연루되었다.[5] 1040년 헤럴드 하레풋이 사망하고 하르다크누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자, 고드윈은 앨프레드 살해 사건에 연루된 탓에 권력이 위협받았지만, 맹세와 거액의 뇌물로 새 국왕의 호의를 얻는 데 성공했다.[6] 1042년 하르다크누트의 죽음으로 고드윈은 킹메이커 역할을 하여 참회왕 에드워드가 잉글랜드 왕위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1045년, 고드윈은 새 국왕이 자신의 딸인 웨섹스의 에디스와 결혼하면서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다.[7]

고드윈과 기사 사이에는 여러 자녀가 있었다. 여섯 아들로는 스베인, 해럴드, 토스티, 기르스, 레오프윈, 울프노스가 있었고(출생 순서), 세 딸로는 웨섹스의 에디스(원래 이름은 기사였으나 참회왕 에드워드와 결혼하면서 앨드기스 또는 에디스로 개명), 군힐드, 엘피구가 있었다. 자녀들의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8] 해럴드는 1045년에 25세 정도였으므로, 그의 출생 연도는 1020년경으로 추정된다.[9]

2. 2. 어머니 기타 가문

해럴드는 웨섹스 백작 고드윈(–1053)과 기사 토르켈스도티르의 아들이었다. 고드윈은 서식스 출신으로, ''테인''이었던 울프노스 칠드의 아들이었으며,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 왕을 지지하다가 1018년 크누트 대왕에 의해 웨섹스 백작으로 임명되었다.[3]

고드윈과 기사 사이에는 여러 자녀가 있었는데, 아들로는 스베인, 해럴드, 토스티, 기르스, 레오프윈, 울프노스(순서대로)가 있었고, 딸로는 웨섹스의 에디스(참회왕 에드워드와 결혼), 군힐드, 엘피구가 있었다.[8] 해럴드는 1045년에 25세 정도였으므로, 102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9]

기사의 형제인 Ulf the Jarl영어은 덴마크 왕스벤 1세의 딸[25]이자 크누트 대왕의 여동생인 아스트리드 스벤스다터와 결혼했다. 울프와 아스트리드의 아들은 1047년에 스벤 2세로 덴마크 왕위에 즉위하게 된다.[26]

2. 3. 형제자매

해럴드는 웨섹스 백작 고드윈과 기사 토르켈스도티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드윈 가문은 많은 자녀를 두었는데, 아들로는 스벤, 해럴드, 토스티그, 위타, 레오프와인, 울프노스가 있었고, 딸로는 참회왕 에드워드의 아내가 되는 이디스, 군힐드, 엘피구가 있었다.[8]

3. 권력 승계 과정

해럴드는 1045년 에드워드와 여동생 이디스가 결혼하면서 이스트 앵글리아 백작에 봉해졌다.[10] 1051년 에드워드가 고드윈 일파를 추방할 때 아버지와 함께 쫓겨났으나, 얼마 후 세력을 회복했다.[52] 1053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웨식스 백작위를 승계했는데, 이는 잉글랜드에서 왕 다음가는 권력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53]

1058년 헤리퍼드 백작을 겸하게 된 해럴드는 잉글랜드 내 노르만 세력 확장을 견제했다. 1062년과 1063년 웨일스의 리웰린 압 그루퍼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고, 1063년 그루퍼드가 부하에게 살해되자 잔존 세력을 격파하여 웨일스 통치권을 회복했다.[16]

1064년 해럴드는 퐁티외 근방에서 난파되었다. 항해 이유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데, 윌리엄의 노르만 침공 이전 연대기에서는 에드워드가 캔터베리 대주교 로버트를 노르망디에 보내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을 후계자로 내정했고, 해럴드는 윌리엄에게 충성 맹세를 하기 위해 노르망디로 가던 중이었다고 한다.[52] 다른 연대기에서는 1051년 아버지 고드윈 추방 때 포로로 잡혔던 동생 울프노트와 사촌동생 하콘을 만나기 위한 목적이었다거나, 단순히 사냥을 나갔다가 조난당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보스햄에서 출발하여 귀도 백작 영지인 퐁티외에 상륙해 포로로 잡혔다는 점은 일치한다. 윌리엄은 해럴드 생포 후 도착하여 그를 풀어주도록 지시했다.[53]

해럴드는 윌리엄 군대를 따라 브르타뉴 공작 코난 2세와의 전투에 참전, 돌드브르타뉴와 에서 코난 군대를 격파하고 디낭에서 그를 생포했다. 윌리엄은 해럴드의 무공을 칭찬하며 무기와 갑옷을 하사하고 기사 작위를 내렸다. 바이외 태피스트리와 다른 노르만 연대기에서는 해럴드가 성(聖)유물을 놓고 윌리엄에게 충성 맹세를 했다고 한다.

토스티그의 부당한 세금 징수가 내전을 불러오자, 해럴드는 노섬브리아 반란을 지원했다. 이는 에드워드 후계자로서 당연한 일이었으나, 집안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토스티그는 노르웨이 왕 하랄 3세와 동맹을 맺었다.

3. 1. 유력 귀족으로 성장

에드워드와 여동생 이디스의 결혼 이후인 1045년, 해럴드는 이스트 앵글리아의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1051년 에드워드가 고드윈 일파를 추방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쫓겨났지만, 곧 세력을 회복했다. 1053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웨식스 백작위를 승계했는데, 이는 그가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1058년, 해럴드는 헤리퍼드 백작을 겸임하며 잉글랜드 내 노르만 세력 확장을 견제했다. 1062년과 1063년, 웨일스의 리웰린 압 그루퍼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1063년 그루퍼드가 부하에게 살해되자 잔존 세력을 격파하고 웨일스의 통치권을 회복하였다.

''Harold Sacramentum Fecit Willelmo Duci'' (윌리엄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해럴드). 바이외 태피스트리


1064년, 해럴드는 퐁티외 근처에서 난파 사고를 겪었다. 항해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윌리엄의 노르만 침공 이전 연대기에서는 캔터베리 대주교 로버트를 에드워드가 노르망디로 파견하여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을 후계자로 내정했고, 해럴드는 윌리엄에게 충성 맹세를 하기 위해 노르망디로 가던 중이었다고 한다.[52] 다른 연대기에서는 1051년 아버지 고드윈이 추방당했을 때 포로로 잡혔던 동생 울프노트와 사촌동생 하콘을 만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도 하고, 단순히 사냥을 나갔다가 조난당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보스햄에서 출발하여 귀도 백작의 영지인 퐁티외에 상륙하여 포로로 잡혔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한다. 윌리엄 공작은 해럴드가 생포된 후 도착하여 그를 풀어주도록 지시하였다.[53]

해럴드는 윌리엄의 군대를 따라 브르타뉴 공작 코난 2세와의 전투에 참전했다. 돌드브르타뉴와 에서 코난의 군대를 격파하고 디낭에서 그를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윌리엄은 해럴드의 무공을 칭찬하며 무기와 갑옷을 하사하고 기사 작위를 내렸다. 바이외 태피스트리와 다른 노르만 연대기에서는 해럴드가 성(聖)유물을 놓고 윌리엄에게 충성 맹세를 했다고 기록했다.

연대기 작가 오더릭 바이테일리스는 해럴드를 "매우 큰 키에 잘생긴 외모, 놀라운 완력, 사람을 움직이는 능력"을 가졌지만, "이러한 능력도 그에게 왕위를 가져오지는 못하였다"라고 평가했다.

토스티그의 부당한 세금 징수가 내전을 불러오자, 해럴드는 노섬브리아 반란을 지원했다. 이는 에드워드의 후계자로서 당연한 일이었으나, 집안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토스티그는 하랄 3세와 동맹을 맺었다.

1045년 1월 23일, 에드워드와 고드윈의 딸 에디스가 결혼했고, 해럴드는 이스트 앵글리아 백작이 되었다. 1044년경 작성된 명령서에 "백작"으로 연서인으로 이름을 올렸고, 1045년까지 공식 문서에 백작으로 자주 등장했다. 이스트 앵글리아 백작 임명 이유 중 하나는 마그누스 1세의 침략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1045년 마그누스 왕의 침략에 대비해 이스트 앵글리아 백작령에서 샌드위치로 파견된 함대를 해럴드가 이끌었을 가능성도 있다.[34] 1043년, 해럴드의 형 스벤 고드윈손도 백작으로 임명되었다.[35] 해럴드는 에디스와 '':en:More danico''(데인족 관습에 따른 혼인) 관계를 시작했는데, 당시 잉글랜드 민중에게 널리 받아들여졌고, 자녀는 적자로 인정되었다. 해럴드는 백작령 지원 확보를 위해 에디스와 혼인했다고 여겨진다.[36]

1047년, 스벤은 수녀 유괴 죄로 망명했다. 스벤의 영지는 해럴드와 비요른이 나누었다.[37] 1049년, 해럴드는 하인리히 3세 지원에 나서 보두앵 5세 반란 진압전에 협력했다. 스벤은 사면을 요구했지만, 해럴드와 비요른은 영토 반환을 거부했고, 스벤은 비요른을 살해했다.[38]

1051년, 에드워드는 고드윈과 적대하는 인물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고 고드윈 일족을 망명시켰다. 그러나 고드윈은 군세를 정비해 에드워드에 대항했고, 1년 후 에드워드는 고드윈을 웨섹스 백작으로 복위시켰다. 1053년 고드윈 사망 후, 해럴드는 웨섹스 백작을 계승하여 왕 다음가는 권력을 가졌다.

1055년, 해럴드는 헤리퍼드를 침공한 웨일스인을 격퇴했다. 1058년, 헤리퍼드 백작에 취임했다. 에드워드 참회왕 영향으로 노르만인 세력이 확대되자, 해럴드는 대항 세력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1062-1063년, 그루피드 압 르웰린에 대한 군사 원정을 수행, 1063년 그루피드 왕을 패배시키고 죽였다.[39]

3. 2. 웨일스와의 전쟁

1055년, 해럴드 백작은 헤리퍼드를 침공하여 그곳을 불태우는 등 웨일스인을 격퇴하고 웨일스로 몰아냈다.[39] 1058년에는 헤리퍼드 백작을 겸하게 되었고, 이후 잉글랜드에서 노르만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지속적으로 견제하였다. 1062년과 1063년에는 웨일스의 마지막 왕자 리웰린 압 그루퍼드가 반란을 일으키자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1063년 그루퍼드가 자신의 부하에게 살해되자 잔존 세력들을 격파하고 웨일스의 통치권을 회복하였다.[39]

3. 3. 노르망디 방문과 윌리엄과의 관계

1064년, 해럴드는 항해 중 북프랑스의 퐁티외 지역에서 난파되었다. 이 항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는데, 노르만 정복 이전에 쓰여진 가장 오래된 노르만 연대기에서는 에드워드 참회왕캔터베리 대주교 로베르 드 주미에주를 노르망디에 보내 노르망디 공 기욤 2세를 다음 잉글랜드 왕 후보로 지명했고, 해럴드는 그 약속에 따라 기욤 공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북프랑스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40] 그러나 연대기 편집자들은 이 기록이 믿을 만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적어도 기욤 공 자신은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제안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기욤 공 쪽이나 노르망디-잉글랜드 양쪽에서 혼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잉글랜드 왕위는 왕족이 마음대로 물려주는 것도, 전임 군주가 후계자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도 아닌, 위탄 회의에서 뽑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해럴드가 파견된 이유로 "헝가리에 망명 중이던 에드워드 참회왕의 조카를 잉글랜드로 데려오기 위해"였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에드워드 참회왕과 기욤 공의 약속에 어긋난다.

나중에 쓰여진 노르만 연대기에는 해럴드가 노르망디에 억류된 형제를 구출하려고 노르망디로 갔다는 의견이나, 단순히 사냥이나 낚시를 하다가 예상치 못한 폭풍을 만나 북프랑스로 떠내려갔다는 기록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해럴드가 보섐에서 출발해 퐁티외 근처에서 난파된 것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조난당한 해럴드 일행은 퐁티외 백작 기 1세에게 붙잡혀 뵈랑빌 백작 성에 갇혔다.

기욤 공은 곧 뵈랑빌 성을 찾아가 해럴드를 넘겨받았다.[41] 해럴드는 이후 기욤 공의 브르타뉴 공작 코난 2세와의 군사 원정에 함께했다. 해럴드는 몽 생 미셸 수도원을 지날 때 기욤 공의 부하 2명을 유사에서 구했다고 한다. 그들은 돌-드-브르타뉴에서 까지 코난 2세를 쫓았고, 디낭에서 코난 2세의 항복을 받았다. 해럴드는 기욤에게서 무기를 받았고, 기사 서임도 받았다. 바유 태피스트리를 비롯한 노르만 문헌에 따르면, 해럴드는 이때 기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기욤의 잉글랜드 왕 즉위를 돕겠다고 약속했다. 에드워드 참회왕이 죽은 뒤, 노르만인들은 해럴드가 잉글랜드 왕이 된 것을 두고 기욤 공에게 한 충성을 어긴 것이라며 즉각 반발했다.

3. 4. 노섬브리아 반란과 토스티그와의 갈등

1065년 토스티그가 세금을 두 배로 인상하여 잉글랜드가 내전에 빠질 위기에 처하자, 해럴드는 형제인 토스티그에 대항하여 노섬브리아 반란군을 지지하고 노섬브리아 백작 모카로 그를 교체했다. 이것은 해럴드의 북부 백작들과의 결혼 동맹으로 이어졌지만, 치명적으로 그의 가족을 분열시켜 토스티그를 노르웨이의 노르웨이 국왕 하랄 3세(하랄 하르드라다)와 동맹을 맺게 했다.[39]

4. 왕으로서의 통치

해럴드는 에드워드와 그의 여동생 이디스가 결혼한 후 1045년에 이스트 앵글리아 백작으로 임명되었다.[52] 1051년 에드워드가 고드윈 가문을 추방했을 때 아버지와 함께 쫓겨났지만, 1년 후 무력을 동원하여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 1053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해럴드는 웨식스 백작 지위를 계승하여 왕국에서 왕 다음으로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

1058년, 해럴드는 헤리퍼드 백작이 되었다. 그는 잉글랜드에서 증가하는 노르만인의 영향력에 반대하는 중심 인물이 되었다. 1062년과 1063년, 해럴드는 리웰린 압 그리피드에 대항하여 일련의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이끌었다. 이 분쟁은 1063년 리웰린이 자신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하면서 끝났다. 1064년, 해럴드는 퐁티외 근처에서 난파되었다. 그가 왜 항해를 떠났는지에 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는데, 윌리엄의 노르만 침공 이전의 연대기에서는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로버트를 에드워드가 노르망디로 파견했으며,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을 그의 후계자로 내정했다고 한다. 즉, 해럴드는 윌리엄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하기 위하여 노르망디로 가던 중이었다는 것이다.[52] 뒤의 노르만 연대기들은 해럴드의 여행에 관한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데, 해럴드는 1051년 아버지인 고드윈이 추방당했을 때 포로로 잡혔던 동생인 울프노트와 사촌동생 하콘을 만날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또다른 연대기 작가는 해럴드가 단순히 사냥을 나갔다가 조난 당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보섐에서 출발하여 기 백작의 영지인 퐁티외에 상륙했고 포로로 잡혔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윌리엄 공작은 해럴드가 생포된 후에 도착하여 그를 풀어주도록 지시하였다.[53]

해럴드는 이후 윌리엄의 군대를 따라 그의 적이던 브르타뉴 공작 코난 2세와의 전투에 참전한다. 그들은 코난의 군대를 돌드브르타뉴와 에서 격파하였고 디낭에서 그를 생포하는 데 성공한다. 윌리엄은 해럴드의 무공을 칭찬하며 무기와 갑옷을 하사했고, 그를 봉신으로 삼아 기사 작위를 내렸다. 바이외 태피스트리와 다른 노르만 연대기에서는 당시 해럴드가 성(聖)유물을 놓고 윌리엄에 대한 충성맹세를 했다고 한다. 같은 연대기는 이후 해럴드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한 것을 두고 맹세를 깨뜨린 벌을 받은 것이라고 적었다.

연대기 작가인 오더릭 바이테일리스는 “이 잉글랜드 남자는 매우 큰 키에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놀랄 만한 완력을 소유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을 움직이는 능력 또한 가지고 있었다. (...) 하지만 이러한 능력도 그에게 왕위를 가져오지는 못하였다.”라고 적었다.

토스티그에 의한 부당한 세금 징수가 내전을 불러오자, 해럴드는 당시 반란을 일으킨 노섬브리아를 지원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에드워드의 후계자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의 집안을 완전히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토스티그는 노르웨이의 왕인 하랄 3세와 동맹을 맺었다.

4. 1. 왕위 계승과 대관식

1065년 말, 에드워드는 후계자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채 혼수상태에 빠졌다. 1066년 1월 5일, 《에드워드 왕의 생애》에 따르면, 왕은 세상을 떠났는데, 잠시 의식이 돌아왔을 때 해럴드를 지목하며 그에게 왕국과 왕비를 보호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바이외 태피스트리에서도 에드워드가 해럴드라고 생각되는 인물을 지목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지만, 이 시점에서 에드워드의 의도는 매우 불분명하다.[54] 다음날 위탄이 열렸을 때 회의에서는 해럴드를 에드워드의 계승자로 추대했다.[55] 그의 대관식은 1월 6일에 이루어졌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행해졌을 것이라 여겨지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56]

''HIC RESIDET HAROLD REX ANGLORUM. STIGANT ARCHIEP[ISCOPU]S''. "여기에 잉글랜드의 왕 해럴드가 앉아있다. 스티간 대주교". 해럴드가 (노르만 전통에 따라)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간 (1072년 사망)에 의해 즉위된 직후 장면. 바이에 시 테피스트리에서 발췌.


얼마 후 해럴드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차지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은 즉시 디브쉬르메르에서 700여 척의 전함을 건조하여 노르망디로 보낼 것을 지시하는 등 잉글랜드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그는 해럴드를 퐁티외에서 구해준 다음에 해럴드가 성(聖)유물을 두고 그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는 것을 널리 알렸는데, 이를 듣고 많은 수의 귀족이 윌리엄에게 지원을 약속하였다.

4. 2. 노르웨이의 침공과 스탬퍼드브리지 전투

노르웨이의 왕 하랄 3세는 잉글랜드 왕위를 요구하며 침공을 개시했다.[57] 하랄의 군대는 토스티그의 군대와 합류하여 타인 강 부근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9월 20일, 요크셔 부근까지 내려온 하랄과 토스티그의 군대는 머시아 백작 에드윈과 노섬브리아 백작 모르카가 이끄는 부대에게 풀포드에서 패배하였고, 5일 후 스탬퍼드브리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모두 전사하였다.[58]

스노리 스투를루손에 따르면, 전투 전에 한 남자가 홀로 하랄 하르드라다와 토스티그에게 다가가 이름을 밝히지 않고 토스티그에게 하르드라다를 배신하면 백작령을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토스티그는 형제 해럴드가 하르드라다에게 무엇을 줄 의향이 있는지 물었고, 그 기수는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크니 잉글랜드 땅 7피트"라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색슨족으로 돌아갔다. 하르드라다는 기수의 대담함에 감명을 받아 토스티그에게 그가 누구인지 물었고, 토스티그는 그 기수가 해럴드 고드윈슨 자신이라고 대답했다.[21] 에드워드 프리먼은 이 이야기가 "명백히 신화적"이라고 묘사했다.

4. 3. 노르망디의 침공과 헤이스팅스 전투

1064년, 해럴드는 항해 중 프랑스 북부의 퐁티외 지역에서 난파되었다. 그의 항해와 그 후의 해난 사고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노르만 정복 이전에 편찬된 가장 오래된 노르만인의 연대기에 따르면, 에드워드 참회왕은 그 이전에 캔터베리 대주교 로베르 드 주미에주를 노르망디에 파견하여 자신의 혈족인 노르망디 공 기욤 2세를 차기 잉글랜드 국왕 후보로 지명했다고 하며, 해럴드는 그 약정에 따라 기욤 공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북 프랑스로 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52] 그러나 연대기 편집자들은 이 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고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적어도 기욤 공 자신은 자신이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제안받았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아마 기욤 공 측이나 노르망디-잉글랜드 양측에서 인식의 혼란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당시 잉글랜드 왕위는 왕족이 마음대로 계승하는 것도, 전임 군주가 후계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도 아닌, 위탄 회의를 거쳐 선출되는 체제를 취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편찬된 노르만인의 연대기에는, 해럴드는 이전부터 노르망디에 억류되어 있는 그의 형제를 구출하기 위해 노르망디로 향했다는 의견이나, 단순히 사냥이나 낚시를 하던 중에 예기치 않은 폭풍을 만나 북 프랑스로 떠내려갔다는 기록이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해럴드는 보섐을 출항하여 퐁티외 부근에서 난파되었다는 것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조난당한 해럴드 일행은 퐁티외 백작 기 1세에게 체포되어, 뵈랑빌의 백작의 거성에 억류되었다고 한다. 기욤 공은 그 후 곧 뵈랑빌 성을 방문하여, 해럴드의 신병을 기 백작으로부터 넘겨받았다고 한다.[53] 해럴드는 그 후, 기욤 공에 의한 브르타뉴 공작 코난 2세에 대한 군사 원정에 종군했다고 한다. 이야기에 따르면, 해럴드는 몽 생 미셸의 요새화된 대수도원을 지나갈 때, 기욤 공의 가신 2명을 유사에서 구했다고 한다. 그들은 돌-드-브르타뉴에서 지방까지 코난 2세를 추격했고, 디낭에서 코난 2세의 항복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해럴드는 그 후, 기욤으로부터 무기를 하사받았고, 또한 서임을 받았다. 그리고 바유 태피스트리를 비롯한 노르만인 문헌에 따르면, 해럴드는 이때 기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기욤의 잉글랜드 왕 즉위를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에드워드 참회왕의 사후, 노르만인은 해럴드가 잉글랜드 왕 즉위를 수락한 것을 받아들여, 그의 기욤 공에 대한 충성을 번복한 것에 대해 즉각 반발의 뜻을 보였다.

1066년 1월 초, 해럴드 왕의 대관식 거행 소식을 들은 기욤 2세는 왕위 탈환을 노리고 잉글랜드로의 군사 침공을 계획하여, 700척의 군선과 물자 수송선을 노르망디 연안의 디브쉬르메르에서 건조하기 시작했다. 기욤은 군사 침공의 명분을 얻는 데 고심했다고 하는데, 해럴드가 이전의 맹세를 어기고 왕위에 올랐음을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로마 교황은 형식적으로 기욤을 정당한 잉글랜드 왕 계승자로 승인했다. 기욤의 잉글랜드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해럴드 왕은 와이트 섬에 군세를 집결시켜 기욤 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기욤의 함대는 그 후 7개월 동안 노르망디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아마 바람의 방향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9월 8일, 해럴드군은 비축 물자가 바닥나자 군대를 해산하고, 해럴드 자신은 런던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같은 날, 노르웨이 왕 하랄 하르드라다는 해럴드 왕의 동생인 토스티 고드윈슨을 데리고 타인 강 하구 부근에 상륙했다.[57]

해럴드 고드윈슨 왕의 화폐


하랄 하르드라다와 토스티 고드윈슨이 이끄는 노르드인 군단은 1066년 9월 20일, 머시아 백작 에드윈·모카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을 요크 근교의 풀퍼드에서 격파했다. 해럴드 왕은 군대를 이끌고 런던에서 급히 북진하여 출진한 지 불과 4일 만에 요크셔 지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9월 25일, 틈을 노려 하랄 군에게 기습을 가해 스탬퍼드 브리지 부근에서 하랄 군을 격파했다. 하랄 왕과 토스티 모두 살해되어 잉글랜드군은 대승을 거두었다.[58]

스노리 스투를루손에 따르면,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전, 말 한 마리에 탄 남자가 하랄 왕과 토스티 앞에 나타났다. 그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토스티에게 "하랄 왕 진영에서 퇴각하는 대가로 이전의 백작령을 돌려주겠다"라는 조건을 제안했다. 토스티는 그 남자에게 "우리 형 해럴드는 멀리 잉글랜드까지 온 하랄 왕에게 무엇을 제공할 건가?"라고 물었다. 그 남자는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크다. 그러므로 7피트의 잉글랜드 땅을 주겠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색슨 진영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하랄 왕은 그 남자의 대담함에 감명을 받아 토스티에게 그 남자의 정체를 물었다. 토스티는 그가 바로 형 해럴드라고 대답했다.[21] 그러나 19세기 역사학자 에드워드 오거스터스 프리먼은 이 이야기를 ''완전한 지어낸 이야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의 장면 52에 묘사된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기르트와 그의 형제의 죽음.
HIC CECIDERUNT LEVVINE ET GYRÐ FRATRES HAROLDI REGIS
(여기 해럴드 왕의 형제 레오프윈과 기르트가 죽다)


1066년 9월 12일, 윌리엄의 함대가 노르망디를 출발했다. 폭풍으로 여러 척의 배가 침몰했고, 이로 인해 함대는 생 발레리 쉬르 솜에 대피하여 바람이 바뀌기를 기다려야 했다. 9월 27일, 노르만 함대는 잉글랜드로 출항하여 다음 날 이스트 서식스 해안의 페벤시에 도착했다. 해럴드의 군대는 윌리엄을 요격하기 위해 행군했는데, 윌리엄은 아마도 7,000명의 병력을 서식스에 상륙시켰다. 해럴드는 헤이스팅스 근처에 급조된 토루에 군대를 배치했다. 두 군대는 10월 14일 헤이스팅스 근처의 센락 언덕 (현재 배틀 타운 근처)에서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격돌했는데, 9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해럴드는 전사했고 그의 군대는 패배했다. 그의 형제 기르트와 레오프윈도 전투에서 사망했다.

5. 해럴드 2세의 죽음

1066년 9월 12일, 기욤 2세가 이끄는 노르망디 군대가 출항했다.[59] 악천후로 인해 배 몇 척이 난파되었고, 함대는 생 발레리 쉬르 솜에서 바람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9월 27일, 노르만 함대는 다시 출항하여 다음 날 페벤시에 약 7천 명의 군대를 상륙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해럴드 2세는 급히 군대를 모아 헤이스팅스 근처에 진지를 구축했다.

10월 14일, 양 군대는 센락 언덕(현재 배틀 근교)에서 격돌했다. 9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해럴드 2세는 전사했고, 그의 부대는 패주했다. 해럴드 2세의 형제인 지타와 레오프와인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59]

5. 1. 눈에 화살을 맞고 사망했다는 설

해럴드의 죽음에 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존재한다. 우선 〈헤이스팅스 전투 서사시〉의 저자인 아미앵 주교 귀도는 해럴드가 윌리엄을 포함한 네 명의 기사에게 살해당했으며, 그의 시신은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보다 약 30여 년 후의 작가인 몬테카시노의 아마튀스는 〈노르만의 역사〉에서 해럴드가 눈에 화살을 맞고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료인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해럴드 왕은 전사하였다.”라는 주석과 함께 눈에 화살을 맞은 기사의 모습을 묘사하였는데, 몇몇 역사가는 그 기사가 아니라 옆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해럴드 고드윈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59]

해럴드가 눈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는 널리 퍼진 믿음은 학문적으로 많은 논쟁의 대상이다. 노르만족의 전투 기록인 ''카르멘 데 하스팅가에 프로엘리오(Carmen de Hastingae Proelio)'' ("헤이스팅스 전투의 노래")는 아미앵의 가이 주교가 전투 직후에 쓴 것으로 전해지는데, 해럴드가 창에 찔리고 네 명의 기사에게 시신이 훼손되었으며, 그중에는 윌리엄 공작도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윌리엄 오브 말름스버리의 ''게스타 레굼 앙글로룸''(Gesta Regum Anglorum)과 헨리 오브 헌팅던의 ''히스토리아 앙글로룸''(Historia Anglorum)과 같은 12세기 앵글로-노르만 역사는 해럴드가 머리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고 전한다. 더 오래된 자료인 아마투스 오브 몬테카시노의 ''르스투아르 드 리 노르망''(L'Ystoire de li Normant, "노르만족의 역사")은 헤이스팅스 전투 후 20년 만에 쓰였으며, 해럴드가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보고를 담고 있지만, 이것은 14세기 초에 추가된 내용일 수 있다. 이처럼 해럴드의 죽음에 대한 자료들은 서로 모순되므로, 현대 역사가들은 어떤 가설과도 타협하지 않고 확정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59]

해럴드가 눈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는 전통을 반영한 바이에우 태피스트리의 해럴드의 죽음 묘사. 위의 주석은 ''[Hic] Harold Rex interfectus est'', 즉 "[여기] 해럴드 왕이 죽임을 당했다"라고 적혀 있다.


"Hic Harold Rex Interfectus Est" ("여기 해럴드 왕이 죽임을 당했다")라는 글이 새겨진 바이외 태피스트리 패널에는 글 아래에 서 있는 인물이 현재 눈에 박힌 화살을 쥐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18세기 말 또는 19세기 초에 태피스트리에 가해진 수정일 수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사람이 해럴드를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패널이 그의 죽음의 순서에서 두 번의 해럴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중앙 인물 왼쪽에 서 있는 인물은 일반적으로 해럴드로 여겨지며, 오른쪽에는 거의 반듯이 누워 말굽 아래에서 훼손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1730년대에 제작된 태피스트리의 에칭은 서 있는 인물이 서로 다른 물체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브누아의 1729년 스케치는 바느질 자국을 나타내는 점선만 보여주는데, 이는 현재 표시된 화살보다 더 길고 깃털이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태피스트리에 있는 다른 모든 화살에는 깃털이 달려 있다. 베르나르 드 몽포콩의 1730년 판화에는 눈에 화살이 박힌 채로 현재 묘사된 서 있는 인물의 모습과 일치하는 머리 위로 들린 창과 같은 실선이 있으며, 그러한 창이 제거되었을 수도 있는 바느질 자국이 태피스트리에서 보인다. 1816년, 찰스 스토사드는 런던 골동품 협회의 의뢰를 받아 바이외 태피스트리의 사본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가설에 따른 묘사를 포함하여 이전에 손상되거나 누락된 부분들을 재현했다. 이 때 처음으로 화살이 등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반듯이 누워 있는 인물에게 열정적인 19세기 복원가들이 화살을 추가했고, 나중에 실밥을 풀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했다. 많은 사람들은 눈에 화살을 맞은 인물을 해럴드로 여기는데, 그 위에 "해럴드"라는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면의 시각적 중심, 즉 비문의 위치가 아닌, 명명된 인물을 식별하는 태피스트리의 다른 예시들을 검토함으로써 논란이 되고 있다. 또 다른 제안은 두 가지 설명 모두 정확하며, 해럴드는 먼저 눈에 부상을 입고, 그 다음 훼손을 당했으며, 태피스트리는 이 두 가지를 순서대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23]

5. 2. 윌리엄을 포함한 기사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설

〈헤이스팅스 전투 서사시〉의 저자인 아미앵 주교 귀도는 해럴드가 윌리엄을 포함한 네 명의 기사에게 살해당했으며, 그의 시신은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적고 있다.[23] 몬테카시노의 아마튀스는 〈노르만의 역사〉에서 해럴드가 눈에 화살을 맞고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해럴드 왕은 전사하였다.”라는 주석과 함께 눈에 화살을 맞은 기사의 모습을 묘사하였는데, 몇몇 역사가는 그 기사가 아니라 옆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해럴드 고드윈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해럴드 고드윈의 죽음


해럴드가 눈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는 널리 퍼진 믿음은 학문적으로 많은 논쟁의 대상이다. 아미앵의 가이 주교가 전투 직후에 쓴 것으로 전해지는 노르만족의 전투 기록 ''카르멘 데 하스팅가에 프로엘리오(Carmen de Hastingae Proelio)'' ("헤이스팅스 전투의 노래")는 해럴드가 창에 찔리고 네 명의 기사에게 시신이 훼손되었으며, 그중에는 윌리엄 공작도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윌리엄 오브 말름스버리의 ''게스타 레굼 앙글로룸''(Gesta Regum Anglorum)과 헨리 오브 헌팅던의 ''히스토리아 앙글로룸''(Historia Anglorum)과 같은 12세기 앵글로-노르만 역사는 해럴드가 머리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고 전한다. 아마투스 오브 몬테카시노의 ''르스투아르 드 리 노르망''(L'Ystoire de li Normant, "노르만족의 역사")은 헤이스팅스 전투 후 20년 만에 쓰였으며, 해럴드가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보고를 담고 있지만, 이것은 14세기 초에 추가된 내용일 수 있다. 이처럼 해럴드의 죽음에 대한 자료들은 서로 모순되므로, 현대 역사가들은 어떤 가설과도 타협하지 않고 확정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Hic Harold Rex Interfectus Est" ("여기 해럴드 왕이 죽임을 당했다")라는 글이 새겨진 바이에우 태피스트리 패널에는 글 아래에 서 있는 인물이 현재 눈에 박힌 화살을 쥐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18세기 말 또는 19세기 초에 태피스트리에 가해진 수정일 수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사람이 해럴드를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패널이 그의 죽음의 순서에서 두 번의 해럴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중앙 인물 왼쪽에 서 있는 인물은 일반적으로 해럴드로 여겨지며, 오른쪽에는 거의 반듯이 누워 말굽 아래에서 훼손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1730년대에 제작된 태피스트리의 에칭은 서 있는 인물이 서로 다른 물체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브누아의 1729년 스케치는 바느질 자국을 나타내는 점선만 보여주는데, 이는 현재 표시된 화살보다 더 길고 깃털이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태피스트리에 있는 다른 모든 화살에는 깃털이 달려 있다. 베르나르 드 몽포콩의 1730년 판화에는 눈에 화살이 박힌 채로 현재 묘사된 서 있는 인물의 모습과 일치하는 머리 위로 들린 창과 같은 실선이 있으며, 그러한 창이 제거되었을 수도 있는 바느질 자국이 태피스트리에서 보인다. 1816년, 찰스 스토사드는 런던 골동품 협회의 의뢰를 받아 바이에우 태피스트리의 사본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가설에 따른 묘사를 포함하여 이전에 손상되거나 누락된 부분들을 재현했다. 이 때 처음으로 화살이 등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반듯이 누워 있는 인물에게 열정적인 19세기 복원가들이 화살을 추가했고, 나중에 실밥을 풀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했다. 많은 사람들은 눈에 화살을 맞은 인물을 해럴드로 여기는데, 그 위에 "해럴드"라는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면의 시각적 중심, 즉 비문의 위치가 아닌, 명명된 인물을 식별하는 태피스트리의 다른 예시들을 검토함으로써 논란이 되고 있다. 또 다른 제안은 두 가지 설명 모두 정확하며, 해럴드는 먼저 눈에 부상을 입고, 그 다음 훼손을 당했으며, 태피스트리는 이 두 가지를 순서대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23]

6. 매장

해럴드는 그의 두 형제와 함께 발견되었다. 시신의 훼손 상태는 매우 심각했으며, 특히 얼굴은 끔찍할 만큼 망가져 있어 시신의 특정한 부분으로만 그들을 식별할 수 있었다.[60] 그들의 시체는 윌리엄 공작의 진영으로 운반되었고, 공작은 기욤 말레라는 사람에게 매장할 것을 지시하였다. 윌리엄은 해럴드의 어머니가 아들의 시체를 얻기 위해서라면 많은 비용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윌리엄은 자신의 탐욕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인 자가 편안하게 묻히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여긴 것이다.[60]

당대의 연대기 작가 푸아티에의 윌리엄의 기록에 따르면 해럴드의 시신은 매장을 위해 정복왕 윌리엄의 동료인 윌리엄 말레에게 넘겨졌다.

다른 사료에는 해럴드의 또 다른 부인인 '고니목' 에디스가 해럴드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하여 윌리엄에게 불려왔을 때, 그녀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해럴드의 시신에 해놓았으며 따로 은밀한 곳에 매장하였다고 적고 있다.[60] 1954년 해럴드의 고향인 보스햄의 교회에서 앵글로 색슨식으로 만들어진 관이 발견되었는데, 이 시체가 바로 해럴드라는 추측을 가져왔다. 그러나 2003년 12월에 시신에 대한 검시 요청은 보스햄이 속해 있던 친체스터 교구로부터 거부되었다. 그전에 이루어졌던 검시에서는 시체가 남자의 것이고, 60살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며, 대체적으로 해럴드의 시신에 대한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보스헴 교회가 친체스터 항구에서 불과 몇 야드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국 해협에서도 가까운 곳이라는 사실이 관에 들어 있는 시체가 해럴드의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이는 푸아티에의 윌리엄이 그의 저작에서 해럴드의 시체가 바다 근처에 묻혔다고 기록하였기 때문이다.[60]

웨스트 서섹스의 보샴 교회: 탑의 아래 세 층은 색슨 시대 것이고, 꼭대기 층은 노르만 양식이다


또 다른 출처에 따르면 해럴드의 미망인 에디스 더 페어는 시신을 식별하기 위해 불려갔으며, 그녀는 그녀만 아는 개인적인 흔적으로 그렇게 했다. 해럴드가 태어난 곳인 보샴과의 강한 연관성, 그리고 1954년 그곳 교회에서 앵글로색슨 시대의 관이 발견된 것은 일부 사람들이 이 곳을 해럴드 왕의 매장지로 추정하게 만들었다. 보샴 교회의 무덤을 발굴하라는 요청은 2003년 12월 치체스터 교구에 의해 거부되었으며, 재무관은 해럴드의 시신임을 밝힐 가능성이 매장지를 훼손할 정도로 충분하지 않다고 판결했다. 1954년의 발굴은 관 안에 있는 한 남자의 유해를 드러냈다. "그것은 훌륭하게 마감된 호샴 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키가 약 약 1.68m인 강력한 체격의 60세 이상(해럴드는 사망 당시 40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의 남자의 대퇴골과 골반뼈를 포함하고 있었다." 관의 내용물은 훨씬 이전에 열려 훼손되었으며, 두개골이 없고 남아있는 뼈가 사후 부패와 일치하지 않는 방식으로 손상되었다고 추정되었다. 유해에 대한 설명은 ''카르멘 데 하스팅가에 프로엘리멘''에 기록된 왕의 운명과 유사하며, 해럴드는 바닷가에 묻혔다고 한다. 보샴 교회에 있는 무덤의 위치는 또한 푸아티에의 윌리엄의 설명과 일치하며, 치체스터 항구에서 멀지 않고 영국 해협이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그가 1060년에 개축했던 월셤 수도원에서 그가 죽은 후에 제대로 된 장례식을 치러 매장했다는 의견이 있다.[61] 또한 헨리 1세가 월셤 수도원에서 해럴드라는 이름의 묘지기 노인을 만났으며, 그 노인이 사실은 해럴드의 유복자인 해럴드 해럴드슨이었다는 전설도 있다. 해럴드가 헤이스팅스에서 죽지 않고 잉글랜드를 탈출했다거나, 나중에 체스터나 캔터베리에서 은둔자로 삶을 마쳤다는 전설도 생겨났다.[24]

7. 해럴드의 가족

해럴드는 고드윈과 위타 토르켈스도티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드윈은 아들 스벤, 해럴드, 토스티그, 위타, 레오프와인과 딸 참회왕 에드워드의 아내 에디스 등을 슬하에 두었다.

20세 이후 해럴드는 덴마크 관습에 따라 '고니목' 에디스와 결혼하여 여섯 자녀를 두었다.[62] 오르데리크 비탈리스에 따르면, 정복왕 윌리엄의 딸 아델리자와 약혼했으나 결혼하지는 않았다.[62]

1066년 1월, 해럴드는 머시아 백작 에드윈의 딸이자 그루피드 압 르웰린의 미망인 에디스와 결혼했다. 남편 사후 에디스는 에드윈, 모르카 형제에게 의탁했으나, 이들은 윌리엄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수감되었다. 이후 에디스는 해럴드의 어머니와 외국으로 망명했다.

해럴드의 딸 위타는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와 결혼했다. 윌리엄 사후(1087년) 해럴드의 아들 울프, 모르카 등은 석방되어 로베르 2세의 가신이 되었다.

다른 아들 고드윈과 마그누스는 헤이스팅스 전투 후 아일랜드 랜스터로 도주, 디어마이트 맥 메이의 지원으로 1068년과 1069년 잉글랜드를 침략했으나 실패하고 아일랜드에서 은둔하다 사망했다.

이후 해럴드의 혈통은 에드워드 2세가 위타의 후손 이사벨라와 결혼하며 영국 왕실에 이어졌다.

7. 1. 가계도

해럴드 2세의 가계도
고드윈 (1001년경 ~ 1053년)
위타 토르켈스도티르
스벤 고드윈고니목 에디스
해럴드 고드윈머시아의 에디스
토스티그 고드윈웨섹스의 에디스
참회왕 에드워드 (1004년경 ~ 1066년), 잉글랜드 왕 (1042년 ~ 1066년)
고드윈 (1049년생)에드문드 (1049년생)
마그누스 (1051년생)웨식스의 지타 (1053년 ~ 1098년)
군힐드 (1055년 ~ 1097년)해럴드 (1067년 ~ 1098년)
울프 (1067년 ~ 1087년)



해럴드는 잉글랜드의 유력 귀족 고드윈과 Gytha Thorkelsdóttir|기사 토르켈스도티르영어의 아들이었다. 기사의 오빠인 Ulf the Jarl|울프 백작영어은 덴마크 왕스벤 1세의 딸[25]이자 크누트 대왕의 여동생인 에스트리드 스벤스다터와 결혼했다. 울프 백작과 에스트리드의 아들은 1047년에 스벤 2세로 덴마크 왕위에 올랐다.[26] 해럴드의 아버지 고드윈의 아버지는 Wulfnoth Cild|울프노스 칠드영어라는 서식스 출신의 종사였다고 한다. 고드윈은 원래 에드먼드 강철왕의 가신으로 활약했지만, 이후 크누트 왕을 지원하여 1018년 크누트 왕에 의해 웨섹스 백작으로 임명되었다.[27]

해럴드는 '고니목' 에디스와 약 20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으며, 그 사이에서 최소 5명의 자녀를 두었다.[62]

오르데리크 비탈리스에 따르면, 해럴드는 정복왕 윌리엄의 딸 Adeliza|아델리자영어와 약혼했었지만,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62]

1066년 1월경, 해럴드는 에드윈 백작의 딸이자 웨일스 공의 미망인인 Ealdgyth, daughter of Earl Ælfgar|에알드기스영어와 결혼했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가 전사한 후, 임신 중이던 에알드기스는 그녀의 형제인 에드윈 백작과 Morcar|모카영어에 의해 구출되어 체스터로 호송되었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에알드기스와 해럴드 사이에 자녀가 없었다는 주장과, Harold, son of Harold Godwinson|해럴드영어와 Ulf, son of Harold Godwinson|울프영어 두 아들이 그녀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참조

[1] 논문
[2] 논문
[3] 논문
[4] 논문
[5] 논문
[6] 논문
[7] 논문
[8] 서적 House of Godwine: The History of Dynasty Hambledon & London 2004
[9] 서적 Harold II: The Doomed Saxon King Tempu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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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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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웹사이트 Harold II https://www.britanni[...] 2020-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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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논문
[20] 웹사이트 Westminster Abbey Official site – Coronations https://web.archive.[...]
[21] 서적 King Harald's Saga Penguin Books 1966
[22] 웹사이트 Bayeux Tapestry https://www.sal.org.[...] College of Antiquaries 2020-05-04
[23] 서적 The Study of the Bayeux Tapestry Boydell and Brewer 1997
[24] 논문
[25] 논문
[26] 논문
[27] 논문
[28] 논문
[29] 논문
[30] 논문
[31] 논문
[32] 서적 House of Godwine: The History of Dynasty Hambledon & London 2004
[33] 서적 Harold II: The Doomed Saxon King Tempus 2005
[34] 논문
[35] 논문
[36] 논문
[37] 논문
[38] 논문
[39] 웹사이트 Harold II https://www.britanni[...] 2020-01-21
[40] 논문
[41] 논문
[42] 논문
[43] 웹사이트 Westminster Abbey Official site – Coronations https://web.archive.[...]
[44] 서적 King Harald's Saga Penguin Books 1966
[45] 웹사이트 Bayeux Tapestry https://www.sal.org.[...] College of Antiquaries 2020-05-04
[46] 서적 The Mystery of the Bayeux Tapestry Univ of Chicago Pr 1986
[47] 서적 The Study of the Bayeux Tapestry Boydell and Brewer 1997
[48] 논문
[49] 문서 애드거 애설링을 마지막 왕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50] 서적 The Norwegian invasion of England in 1066
[51] 웹사이트 The Fall of Orthodox England: The Spiritual Roots of the Norman Conquest, 1043-1087 http://www.orthodoxc[...]
[52] 서적 1066: The Year of the Conquest 팽귄 북스
[53] 서적 1066: The Year of the Conquest
[54] 서적 Edward the Confessor 캘리포니아 대학교 출판부
[55] 문서 당시 에드워드의 종손이었던 에드거 에설링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우선하여 승계하였던 것이다.
[56] 웹사이트 Westminster Abbey Official site - Coronations http://www.westminst[...]
[57] 문서 그의 왕위 주장은 잉글랜드와 덴마크의 왕인 하르덱누드와 노르웨이의 왕 망누스 1세 사이에 맺어진 협정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하르덱누드 사후 망누스는 덴마크의 왕위는 차지하였으나, 잉글랜드의 왕위는 차지하지 않았다. 즉, 하랄 3세는 망누스 1세의 뒤를 이은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잉글랜드의 왕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58] 서적 King Harald's Saga Penguin Books 1966
[59] 문서 출항 당시에도 기상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윌리엄이 하랄의 계획을 알고 있었고, 해럴드의 군대가 하랄과 토스티그와 싸워 약해진 틈을 노리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60]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s://web.archive.[...] 2011-01-27
[61] 서적 William the Conqueror: First Norman King of England
[62] 웹인용 Adeliza (d 1066) https://web.archive.[...] 스미스 앤 엘더 출판사 2011-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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